봉준호의 세계에서 '수직 공간'에 대한 암시와 집착은 노골적이다.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입주민과 아파트 지하실의 경비원, 노숙자의 공간적/계급적 대비가 선명했던 <플란다스의 개>가 대표적이다. 또한 <괴물>에서는 지상(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서민 가족과 고층 SK빌딩에서 생활하는, 성공한 운동권 선배가 등장하고 한강 하수구 지하공간을 은신처로 삼는 음침한 괴물이 등장한다. 이렇듯 봉준호 감독은 수직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계급 구조를 손쉽게 형상화한다. 심지어 <옥자>에서조차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의 생활공간인 초고층 빌딩 상층부의 환한 햇빛과 옥자가 감금된 지하실험실의 짙푸른 색감이 극명한 시각적 대조를 이룬다.
영화 <기생충> 또한 박사장(이선균) 내외의 저택의 구조 자체가 사회적 계급 구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박사장의 저택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다층적인데, 우선 부유층 가족들이 생활하는 지상 1~2층이 있고, 집사인 문광(이정은)이 주로 드나드는 지하실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문광의 남편이 숨어 지내는 지하 벙커가 존재한다. 이른바 '지하의 지하'가 존재하는 격이다. 이는 현실의 계급 구조와도 맞닿아있다. 그리고 이 지하 벙커와 지상을 오가며 두 공간을 잇는 연결고리 같은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집사 문광이다. 지하 벙커에 기생하는 그녀의 남편이 실패한 하층민이라면, 문광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 나름대로의 입지를 구축하여 부유층의 경제적 부스러기를 맛보는 성공한 하층민 정도 되겠다. 겉으로 보기엔 박사장네 가족과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자며 함께 생활을 공유하지만 문광은 그들과 근본부터 다르다. 기정(박소담)과 기우(최우식)의 말처럼, 집주인이 안보는 곳에선 안주인처럼 행세하며 그들의 생활양식을 흉내 내는 그녀이지만, 영교(조여정)의 말 한마디에 직장을 잃고 쫓겨나는 파리 목숨 같은 존재. 이것이 문광의 처지이자 현실이다.
부유층 가족에게 비현실적인 단체 사기를 치는 기택(송강호)의 가족보다도, 아예 지하 벙커에 숨어살며 집주인을 동경하는 근세(박명훈)보다도, 어쩌면 이 '문광'이란 캐릭터가 가장 현실적인 기생충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파리 목숨 같은 끈을 부여잡고 부양의 의무를 짊어지고 스스로 생존하고 생존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처절히 읍소하고 때로는 맹렬히 겁박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어가는 내 식구 살리자고 모든 걸 다 제쳐두고 비바람 치는 야밤에 주인집 초인종을 수없이 누르던 그녀의 피멍든 얼굴은 어찌 보면 애처롭다. 그전까지 이어지던 작품의 블랙 코미디 분위기를 단번에 스릴러로 바꿔버리는 초인종 화면 속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등장은, 그 순간에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웠지만 이제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안타깝고 애잔하다. 심지어 그녀는 미련할 정도로 착하기까지 해서 발길질 한방으로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만든 충숙(장혜진)을 좋은 사람이라고 두둔하기까지 한다.
영화 <기생충>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마음 줄 곳 많아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학창시절 반지하 집에서 살았던 개인적 경험 때문일까,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기택네 가족의 일상이 남일 같지 않았다. 꼭 반지하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구질구질한 삶의 밑바닥을 직면하고 해쳐내며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택네 가족의 행보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좋은 유괴'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존을 위한 이들의 '착한 사기'는 자못 우스운 블랙 코미디로 포장되어 관객들의 마음속에 이질감 없이 스며든다.
그러니까 영화 초반, 적절한 유머가 동반된 이들 가족의 단체 사기 행각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면서 이것이 일종의 '사회 시스템을 향한 정당방위' 쯤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즉, 악인이 아닌 평범한 부유층 가족을 얄팍하게 속이는 이들의 사기 행위가 보는 입장에서 통쾌하진 않아도, '그래, 사회가 이런데 저렇게라도 먹고살아야지.', '현실이 팍팍한 걸 어쩌겠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 달까. 이렇게 주인공 가족의 사기극이 들통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야기에 몰입하던 어느 순간, 문광의 초인종씬 이후 스릴러로 바뀌는 극의 흐름은 장르의 급변과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급물살을 탄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문광 내외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되고나서부터는 그들의 입장도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기생하려 드는 기생충과 기생충의 처절한 싸움의 와중에 어느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기 어려운 찝찝하고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은 이들의 다툼이 문광의 죽음과 이로 인한 무차별 살인으로 폭발하는 결말부에 가서는 황당한 죽음을 맞이하는 박사장의 입장에까지 이입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적당히 위선적이고 체면을 따지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배려하는 박사장의 모습은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의 행동양식과도 겹쳐지는 면이 있다. 그러니 박사장 내외의 행동이 마냥 한심하거나 밉지가 않다. 더군다나 ‘따지고 보면 박사장 내외는 무슨 잘못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나면 악인은 없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버린 결말에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그래서 <기생충>은 처음엔 우습다가 중간에는 기괴하고 무서웠다가 결국엔 숙연해지고 씁쓸해지는 그런 작품이다. 비교하자면, 비슷한 류의 계급 투쟁적 시각을 담고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고 차가운 '거리두기와 관조'를 유지하며 단 한순간도 관객의 감정이입과 캐릭터에 대한 동화를 허락지 않는 <복수는 나의 것>과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해있다. <기생충>은 무섭도록 몰입하게 만들며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깊숙하게 명치를 찌른다. 즉, 전쟁에 비유하면 치가 떨리도록 무시무시하고 치열한 난타전이자 근접전이다. 관객을 포탄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몰아넣고 어떤 상처나 트라우마가 생기든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는 식이다. 결국 생환은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