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10.

21세기 세계질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보다 넓고 큰 그리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자고 합의했습니다. 국제연합이 창설되고, 세계인권헌장이 채택되었으며, 수많은 주권국가들이 새로이 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냉전 동안에도 대부분의 인류는 하나의 경제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규모의 부의 팽창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새로이 번영의 길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국을 보면, 정말 뭐랄까 굉장히 역사적인 시점, 아니 분기점에 있는 거 같습니다. 국제질서 그 자체가, 특히 냉전 이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대전제들이 흔들리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최근 티모시 스나이더의 책 "The Road to Unfreedom: Russia, Europe, America"을 읽고나니, 그런 생각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에 더해 미국의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최근에 저술한 "Fascism"이라는 책도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죠.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더욱 더 과거와 전통 그리고 권위에 집착하고 있고, 국가는 사회에 대한 강권통치를, 그리고 종교는 사회에 대한 간접통치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을 만들면서, 사회를 끊임없이 긴장상태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유럽은 정치적 리더십을 상실했고, 여기에 더해 구조적인 경제문제까지 겹쳐 극단주의적 세력이 점차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민과 이민자 문제는 사회를 더욱 분열시켰고, 이를 이용한 선동가들은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점점 더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죠. 

하지만 역시 가장 큰 걱정은 미국입니다. 왜냐하면 세계 최대최강의 국가이며, 현 세계질서를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축인데, 이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고, 이 미국의 정치문화가 "자유주의적 질서"에 정면적으로 대비되는 무언가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우려하고 있고, 앞서 언급한 The road to unfreedom 같은 책이 나오는 것이겠죠.

개인적으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1930년대 유럽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코스모폴리탄-세계주의적 문화, 큐비즘 등의 새로운 예술사조, 재즈클럽, 신여성, 자유주의적 보편주의 등 이러한 것들이 1920년대에도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화려하고, 자유주의적이며, 인류박애적인 것도 한 찰나에 불과했고, 불과 10년 후 파시즘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 위와 유사한 보편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적이고 또 세계지향적인 문화를 누렸고, 또 확산시켰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는 과거지향적이며, 반동적이고 또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부상하고 있죠. 러시아, 터키, 필리핀, 이탈리아 등....

세계화의 실패와 IT및 SNS의 확산 때문일까요?

1920년대에도 세계화의 혜택은 일부만 누렸고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소외되었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혜택은 극소수가 차지했으며, 대다수는 이로부터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절대적 번영은 증가했지만, 그 과실의 큰 부분은 아주 극소수의 인류가 차지한 것이죠.

그리고 과거 라디오가 파시즘 정권들의 무기가 되었듯이, 오늘날 인터넷과 SNS는 독재자나 선동가들의 무기가 되고, 이른바 Post-Truth 시대가 도래했다고 합니다.

IT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독재국가들에게 훨씬 더 효율적이고 압도적인 통제력을 제공하고 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SNS의 확산은 전통적인 지식인 계층과 매체의 신뢰 상실과 겹쳐 누구나 아무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가 확산되는 것은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클릭수"입니다. 그리고 클릭수라는 것은 매우 쉽게 조작될 수 있죠.

사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1970~80년대가 인류 역사에서 유난히 특이했던 시대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은 가장 1명의 수입으로 내집 마련과 내차 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세계는, 빈곤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가장 1인의 수입으로 생계를 충당하기란 매우 어렵고 내집 마련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최대의 매출을 갱신하고 있다는 기업들이 창출하는 고용은 매우 작으며, 아주 적은 노동력으로도 엄청나게 큰 부를 일구고 있죠.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게는 기회의 천국이 되며,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남은 일자리는 언제든 대체가능한 비정규직 일자리 뿐입니다 (그리고 AI및 자동화로 인해 이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없어지고 있습니다)

IT혁명이 이 트렌드를 가속화시키고 있는데, 과연 많은 나라들이 이러한 구조적인 산업의 재편을 견뎌낼 수 있을지....특히 젊은 미숙련 노동인구가 많은 나라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북아프리카, 중동 등...) 이들의 정치제도나 사회제도가 이러한 충격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물론 저개발 국가들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지만, 선진국이 입는 타격도 결코 적지 않아서, 유럽과 미국도 계속 신음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러스트벨트라 불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세계화가 아닌, 보호무역을 외치고,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아닌 '국수주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에 많은 나라들이 과거의 영광이나 신화를 찾아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고 있죠. 트럼프의 "MAGA 슬로건"이나 러시아의 "정교회" 그리고 아랍국가들의 "이슬람"이나 또는 터키의 "신오스만주의"(에르도안은 이슬람이 아니라 '오스만주의'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모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폐쇄적이고, 타자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존재한 적이 없었던 상상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나 슬로건들은 세계의 구조적 문제, 가령 최상위 엘리트들이 전세계 대부분의 부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산업군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 지구의 자원 (꼭 석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 많은 금속과 1차재료 등) 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 세계화와 미디어 및 SNS로 인한 전지구적(수평적)/전계층적(수직적) 동시성(同時性)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상대적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따라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뭐랄까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를 유지시켜주던 모델이 한계에 도달한 거 같고, 점점 균열이 발생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세계의 모습을 조금씩 와해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중국은 국가 내부의 구조적 문제를 경제성장과 IT 기술을 접목시킨 압도적이고 전방위적인 통제로 봉합하려고 하는데, 과연 성공할지.... 중국 역사의 주기적인 사이클은 극심한 빈부격차 끝에 거대한 농민봉기나 종교봉기로 국가가 와해되는 것인데.... 21세기 IT기술로 무장한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역사적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일지...

하여간 정말 비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