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까지 정주행한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도 이 드라마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많이들 아시는 대로
김갑수 옹이 맡은 양진만 전 대통령 역할은 노무현 대통령을 모델로 하고 있죠.
흔한 오마주 아닙니다.
극중 이름만 다른 그냥 노통 그 자체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드라마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노통의 말투는 당연하고 서민친화적 행보와 한반도 평화, 평생의 지방분권 대업까지 그대로 갖다 썼습니다.
물론 원작도 그렇고 전직 대통령에 많은 비중을 둘 수 없는 스토리 구조상
노통을 다시 만나는 감동이 변호인에 비견할 바도 아니고 폭발적 반응을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원작과는 다르게 제작진이 갑수옹 분량에 묵직한 힘을 준 의도는 명확해 보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TV 드라마에서 노통이 이렇게 부활한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지진희 씨가 연기하는 대통령 권한대행 박무진도 원작과는 약간 결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박무진은 갑수옹 후보시절의 소박하지만 강단있는 유세를 멀찍이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백면서생입니다.
정치판의 생리는 전혀 모르지만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원칙은 누구보다 확고하죠.
원작은 본 지가 오래돼서 좀 가물가물하지만 키퍼 서덜랜드는 꽤나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때로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지키는 대통령 권한 대행,
노통의 화신인 양진만의 후계자,
폐허를 딛고 엉망진창이 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강단있고 멋있는 지도자,
노통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제작진이 누굴 롤 모델로 삼았는지 역시 확실해 보이죠.
양진만 대통령은 박무진이 장관 임명식장에서 정장에 캐주얼화를 신고 있는 걸 보고
책상 밑에 있는 자기 구두를 꺼내와서는 즉석에서 선물합니다.
대통령이 하사한 구두를 어쩔 수 없이 신고 다니는 박무진은 큰 곤경에 처할 때마다 구둣발을 비비적댑니다.
누가 봐도 발에 맞지도 않고 원치도 않았던 구두를 신고 있느라 심히 불편해 하는 모습,
하지만 박무진은 그럴 때마다 올바른 결정을 결연하게 내리며 시청자들의 의심을 불식시킵니다.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노통의 요청으로 청와대에 불려 나왔고,
자신의 운명에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 노통의 예기치 못한 서거로 대선에까지 나선,
대통령이 된 지금도 본인 정체성에 맞지 않는 정치의 옷을 입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심사숙고해 옳은 결정을 내리고 뚝심있게 밀어붙이는 원칙주의자 문재인의 모습 그대로죠.
제가 이 드라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노통을 소환하고 문통 오마주를 선보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초반부 북한 잠수함이 테러의 배후로 의심받는 과정에서 보여준 연출도 새삼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구시대적 냉전 논리에 빠져 데프콘 발령하고 난리 피우는 군 장성들과 국정원의 모습을 긴박하게 보여주죠.
무슨 일만 터지면 당연하다는 듯 북한을 지목하고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허상을,
박무진이 드러난 객관적 사실과 과학적 팩트로만 반박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시청자들이 부지불식간에 냉전 논리를 우습게 보도록 끌고 가는 거고, 매우 세련되게 조롱하는 거죠.
테러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는 과정이나,
테러 용의자인 북한군 장교 출신 명해준이 붙잡혔을 때 국정원 직원들이 보여주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북한은 정상국가로 인정받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런 테러를 자행할 리가 없지 않냐'고 먼저 다그치는 게
다름 아닌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국정원 과장입니다.
바뀐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스토리에 반영함으로써 시청자들을 그쪽으로 끌고가는 거죠.
별 대단한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떠는 거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불과 3년전에 이런 내용의 드라마가 나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레전설 드라마로 추앙받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지금 이 좋은 시기에 이런 드라마 만드는 게 당연하다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극우적 논리가 여전히 판을 치고 살벌한 이념공격이 이어지는 현실에서
굳이 원작의 맥락과 다르게 판을 이렇게 짜고 들어온 제작진의 용기와 의지에는 충분히 박수보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