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의 전기를 썼던 David Maraniss는 워싱턴포스트지에서 클린턴의 이러한 1인 2역이 그의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하는 성격적 특징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칸소 주의 작은 마을의 어려운 가정환경을 견뎌내며 힘겨운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여러 모순적인 모습들을 때때로 서로 다른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며 지내왔다는 것이다.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라고 하는 방어기제는 자신의 내면에 공존하기 어려운 모순되는 특징들 사이에 구획, 벽을 세워 그들을 함께 유지시키는 행태이다. 앞서 이야기한 다중인격의 방어기제인 '해리'가 자기 내면의 서로 모순되는 마음들로 결국 스스로를 둘로 쪼개버리는 양상이라면, '구획화'는 격벽으로 나뉘어진 사무실처럼 억지로 그 둘을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권력에 의한 폭력을 막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고수하는 강직한 마음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정직하고 강건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때로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여자 비서를 보며 성적으로 유혹하거나 범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성과 본능적 충동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는 그 둘이 얼마든지 함께 발생할 수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선하고 조금씩은 악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 사람들은 이성이 충동을 억압하여 욕망을 자제할 것이고, 몇몇 일부 범죄자들은 충동이 이성을 압도하여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해리'를 하는 다중인격장애 환자라면 이런 경우 한없이 꼿꼿하고 청렴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도 조절할 수 없이 또 다른 사람이 튀어나와 흉포하게 비서를 겁탈하고 다시 곧 그 기억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반면, 이와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다르게, '구획화'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정치하는 나' 이고 비서와의 일은 '사생활의 나'라며 서로 다른 영역의 일이기 때문에 공존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할 것이다.
즉 '구획화'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들이 서로 해리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금 더 발달한 형태의 방어기제, 어떻게 보면 또다른 형태의 '합리화'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긍정적으로 작동할 경우 구획화는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처럼 모범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구획화를 통해 공적인 일에서 냉혹하고 칼 같은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사적인 영역에서는 또 한없이 따뜻하고 공감적인 모습을 보이며 적절하게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오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악을 구획화하듯 약물로 분리하고자 했던 지킬박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자신도 모르게 강력해지는 하이드의 모습에 점차 압도되어 간다. 그리고 하이드의 악행도 점차 심해져 연쇄살인을 저지르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결국 지킬박사, 아니 하이드는 점차 괴기스러운 파멸로 치닫고만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예전부터 권위와 위계에 의한 성적 착취나 희롱이라는 부끄러운 면면들을 알면서도 모른체, 구획화해왔는지 모른다. 여성인권 신장과 권위주의 사회로부터의 탈피를 계속 부르짖으면서도, 한편으로 개개인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권위적 압력들을 묵인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그 두 모순을 버젓이 등에 업고서도, ‘이건 이거고 저건 어쩔 수 없는 저거다’라는 구획 속에 스스로 합리화해왔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합리화된 치부는 점차 곪아갈 따름이다. 하이드의 악행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결국 지킬을 집어삼켰듯, 언제까지나 부정하고 싶은 스스로의 부끄러운 얼굴을 못 본체 할 수는 없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모른체하고 있던 우리 사회의 하이드가, 이제 문화예술계를 넘어 정치계에서까지 구획화된 격벽을 넘어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그 충격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지금의 미투 물결이 그 구획과 합리화를 허물어내길 기대해볼 따름이다. 애써 외면해온 우리 스스로의 곪은 상처를 이제는 겸허히 직면하고, 기꺼이 도려낼 수 있는 성숙한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 정신의학신문 "안희정 성폭행 스캔들, 모순을 가두다 - 가려진 욕망" 중에서